내구·GT 레이스

신사들의 질주 — 벤틀리 르망 전설, 100년을 달리다

**르망의 밤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차는 그저 완주하고, 어떤 차는 역사를 쓴다.** 1924년부터 1930년 사이, 영국 신사들이 녹색 레이서를 몰고 사르트 서킷을 지배했을 때, 벤틀리는 단순한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 전설은 수십 년의 침묵을 건너 21세기에 다시 깨어났다.

3줄 요약
1벤틀리는 1924년부터 1930년 사이 르망 24시에서 다섯 차례 우승하며 ‘Bentley Boys’라는 불멸의 신화를 만들었다.
270여 년의 공백 끝에 2001년 르망에 복귀한 벤틀리는 2003년 Speed 8으로 1·2위를 석권하며 전설을 이었다.
3벤틀리의 르망 DNA는 오늘날 럭셔리 GT 문화와 한국 모터스포츠 팬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한 자동차 브랜드의 레이싱 역사를 단순히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1920년대 르망의 진흙탕 직선로를 달리던 ‘신사 레이서’들이 어떻게 벤틀리라는 이름을 전설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전설이 어떻게 21세기에 되살아났는지를 서사 중심으로 따라간다. 벤틀리 르망의 이야기는 단순한 모터스포츠 연대기가 아니다. 그것은 속도와 품격이 충돌하고, 결국 공존한 인간 드라마다.

한눈에 보는 벤틀리 르망
르망 총 우승 횟수6회 (1924·1927·1928·1929·1930·2003)
첫 우승 연도1924년 (드라이버: John Duff·Frank Clement)
2003년 우승 머신Bentley Speed 8 (No.7·No.8 1·2위 동반 석권)
2001년 복귀 당시 팀Team Bentley (EXP Speed 8 프로토타입 투입)
브랜드 창립1919년, W.O. 벤틀리 설립
벤틀리 르망
신사들의 질주 — 벤틀리 르망 전설, 100년을 달리다 · 사진 Brian Snelson,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창립 5년 만에 르망을 정복한 브랜드

월터 오웬 벤틀리(W.O. Bentley)가 1919년 런던 크릭우드에 작은 공장을 세웠을 때, 그의 꿈은 명확했다. ‘좋은 차를 빠르게, 빠른 차를 좋게.’ 이 단순한 철학은 곧 레이스트랙 위에서 시험대에 올랐다. 창립 불과 5년 뒤인 1924년, 존 더프(John Duff)와 프랭크 클레멘트(Frank Clement)가 3리터 벤틀리를 몰고 르망 24시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자동차 산업 자체가 아직 초기 단계였음을 고려하면 이는 경이로운 성취였다.

1924년 우승은 우연이 아니었다. 벤틀리는 레이싱을 마케팅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 실제 경주에서 얻은 기술 피드백이 양산차 설계에 그대로 반영되는 구조였고, 그 결과 벤틀리 차량은 도로 위에서도 레이스카에 준하는 내구성과 신뢰성을 자랑했다. W.O. 벤틀리 본인이 엔지니어링에 직접 관여하며 각 레이스 결과를 분석했다는 기록도 이 시기의 진지한 레이스 철학을 잘 보여준다.

르망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내구 레이스였다. 포장 상태가 고르지 않은 사르트 서킷을 24시간 달리는 것은 단순한 속도 경쟁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한계를 동시에 시험하는 무대였다. 벤틀리는 바로 그 무대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영원히 각인시켰다.

W.O. 벤틀리는 누구인가
월터 오웬 벤틀리(1888~1971)는 영국의 자동차 엔지니어이자 레이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항공기 엔진 설계에 참여했으며, 전후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 직접 레이스에 출전한 실전 엔지니어였으며, 1931년 경영난으로 롤스로이스에 회사를 매각한 뒤에도 자동차 업계에 종사했다.

Bentley Boys — 신사복을 입은 레이서들

벤틀리 르망
벤틀리 르망 · 사진 | El Caganer / Craig Howell,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Bentley Boys’라는 명칭은 공식 팀 이름이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 르망과 여러 영국 레이스에 출전했던 벤틀리 드라이버들을 통칭하는 애칭이었다. 울프 반나토(Woolf Barnato), 팀 버킨(Sir Tim Birkin), 글렌 킨다이크(Glen Kidston), 버나드 루빈(Bernard Rubin)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레이싱으로 생계를 꾸리는 직업 레이서가 아니라, 상류층 배경을 가진 아마추어 신사 레이서였다는 점이다.

울프 반나토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였다. 다이아몬드 광산업으로 거대한 부를 축적한 남아프리카계 영국인이었던 그는 1928년부터 1930년까지 3년 연속 르망 우승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그를 르망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개인 드라이버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반나토는 재정 지원자이자 실제 드라이버로서 벤틀리의 레이스 프로그램 전체를 사실상 떠받쳤다. 벤틀리 컴퍼니가 1920년대 후반 경영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 자금을 투입해 팀을 유지한 것도 반나토였다.

팀 버킨 경은 또 다른 유형의 인물이었다. 슈퍼차저(과급기)를 장착한 ‘블로어 벤틀리(Blower Bentley)’ 개발에 집착했던 그는 W.O. 벤틀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4.5리터 과급 엔진 버전을 레이스에 투입했다. W.O. 본인은 슈퍼차저가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높인다’며 반대했지만, 버킨의 블로어 벤틀리는 관중들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다. 이 과감한 실험 정신이야말로 Bentley Boys가 단순한 부유층 레저 클럽이 아니라 진지한 레이서 집단이었음을 증명한다.

Bentley Boys의 라이프스타일은 레이스 외적으로도 화제였다. 그들은 레이스 전날 밤 런던 나이트클럽에서 파티를 즐기고 이튿날 아침 사르트로 달려간다는 일화로 유명했다. 사실인지 과장인지 알 수 없는 이 일화들은 오히려 그들의 신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속도와 우아함, 무모함과 기품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 역설이 ‘Bentley Boys’라는 브랜드를 역사에 새긴 진짜 힘이었다.

‘그들은 레이스 전날 밤 런던에서 춤을 추고, 다음 날 르망에서 우승했다’ — Bentley Boys를 둘러싼 전설적 일화

1927년 화이트 하우스 크래시 — 전설을 만든 밤

벤틀리 르망 역사에서 1927년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해 르망에서는 레이스 초반 1코너 직후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 구간에서 대형 충돌 사고가 발생했다. 선두 그룹에 있던 여러 차량이 얽히며 트랙이 사실상 차단됐고, 그 사고에서 살아남은 벤틀리 4.5리터를 레슬리 반필드(Leslie Bamfield)와 두들리 빙엄(Dudley Benjafield)이 몰아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이 승리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일어선 승리’로 불리며 벤틀리의 내구성 신화를 완성하는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단순히 승리 때문만이 아니다. 사고 현장에서 벤틀리 드라이버들이 서로를 돕고, 기권 대신 계속 달리기를 선택했다는 스토리가 이후 ‘Bentley Boys 정신’의 핵심 서사가 됐다. 르망은 속도만의 레이스가 아니라 판단력, 절제, 팀워크의 레이스이기도 하다는 것 — 벤틀리는 그 교훈을 1927년에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1927년 우승 직후 벤틀리는 1928·1929·1930년 연속 우승을 이어갔다. 특히 1929년 우승 머신인 스피드 식스(Speed Six)는 오늘날까지도 벤틀리 레이스카 중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 중 하나로 꼽힌다. 긴 보닛, 오픈 코크핏, 거대한 와이어 휠 — 이 실루엣은 1920년대 자동차 디자인의 정수였고, 이후 수십 년간 벤틀리 미학의 원형이 되었다.

벤틀리의 1920년대 르망 우승 차종
1924년 우승: 3리터 벤틀리 / 1927년 우승: 3리터 벤틀리 / 1928년 우승: 4.5리터 벤틀리 / 1929년 우승: 스피드 식스(Speed Six) / 1930년 우승: 스피드 식스(Speed Six). 스피드 식스는 6.5리터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했으며, 1929~1930년 연속 우승으로 르망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벤틀리 레이스카 중 하나로 기록된다.

침묵의 70년 — 전설은 기억 속에서 살았다

벤틀리 르망
벤틀리 르망 · 사진 Mike Roberts from London, United Kingdom,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931년 벤틀리가 롤스로이스에 인수된 이후, 브랜드의 레이스 활동은 사실상 중단됐다. 롤스로이스는 벤틀리를 럭셔리 세단 브랜드로 운영했고, 레이스트랙과 벤틀리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1930년 마지막 르망 우승 이후 수십 년간 벤틀리의 이름은 르망 그리드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Bentley Boys의 이야기는 모터스포츠 역사서와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살아남았다.

1998년 폭스바겐 그룹이 벤틀리를 인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폭스바겐 그룹은 아우디, 폭스바겐, 람보르기니 등과 함께 벤틀리를 포트폴리오에 편입했고, 레이싱 복귀에 대한 논의가 내부에서 시작됐다. 벤틀리가 단순한 럭셔리 브랜드를 넘어 퍼포먼스 헤리티지를 가진 브랜드로 재정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나 70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벤틀리가 마지막으로 르망을 달렸던 1930년과 2001년 복귀 사이에는 포르쉐의 전설, 재규어의 도전, 맥라렌의 혁명, 그리고 아우디의 지배가 모두 담겨 있었다. 르망 기술은 1930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화해 있었다. 벤틀리가 다시 이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헤리티지만으로는 부족했다. 진짜 경쟁력이 필요했다.

2001년 르망 복귀를 앞두고 벤틀리 팀은 EXP Speed 8이라는 프로토타입 레이스카를 개발했다. 아우디의 기술 지원을 받되, 벤틀리의 정체성을 담은 독자적 머신이었다. 이 차가 2001년 처음 사르트 서킷을 달렸을 때, 관중석에서는 70년 전 Bentley Boys를 기억하는 노령의 팬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에게 녹색 벤틀리의 귀환은 단순한 레이스 이상의 의미였다.

빠른 차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올바른 이유로 빠른 차를 만들어야 한다.

— W.O. 벤틀리 / 브랜드 철학을 압축한 전언

2003년 Speed 8 — 전설의 귀환, 그 이상의 완성

2001년과 2002년의 복귀 시즌은 학습과 준비의 시간이었다. 2001년 EXP Speed 8은 4위와 완주라는 성적으로 가능성을 증명했고, 팀은 2002년에도 경쟁력 있는 성적을 거두며 축적된 데이터를 2003년 최종 머신인 Speed 8에 쏟아부었다. Speed 8은 4리터 트윈터보 V8 엔진을 탑재한 르망 프로토타입(LMP)으로, 아우디 R8의 섀시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벤틀리 특유의 그린 컬러와 디자인 언어를 담았다.

2003년 6월, 사르트 서킷. 24시간이 끝났을 때 체커 플래그를 처음 받은 차는 7번 벤틀리 Speed 8이었고, 두 번째 차 역시 8번 벤틀리 Speed 8이었다. 73년 만의 르망 복귀 우승이자, 1·2위 동반 석권이라는 완벽한 귀환이었다. 드라이버진은 톰 크리스텐슨(Tom Kristensen), 리날도 카펠로(Rinaldo Capello), 가이 스미스(Guy Smith)가 7번 차를, 존 허버트(Johnny Herbert), 마르코 베르너(Marco Werner), 다린 매닝(Darin Manning)이 8번 차를 맡았다.

이 승리가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한 우승 그 이상이었다. 벤틀리 Speed 8의 1·2위 피니시는 브랜드가 레이싱 복귀를 통해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새 소유주 폭스바겐 그룹 아래에서 벤틀리는 단순히 럭셔리 브랜드가 아니라 ‘속도와 품격을 동시에 구현하는 브랜드’로 재탄생했다. 2003년 이후 벤틀리 컨티넨탈 GT 등의 고성능 양산차 라인업도 이 레이싱 DNA를 마케팅과 설계에 적극 반영했다.

물론 2003년 이후 벤틀리는 르망 LMP 클래스에서 더 이상 우승하지 못했다. 팀은 이후 수년간 GT 클래스로 방향을 전환했고, 최상위 프로토타입 클래스 경쟁은 다른 브랜드들의 무대가 됐다. 하지만 2003년 Speed 8의 승리는 벤틀리의 모터스포츠 서사에 두 번째 황금장을 쓰기에 충분했다. 1920년대 Bentley Boys의 영혼과 21세기 엔지니어링 기술이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73년 만의 귀환, 그것도 1·2위 동반 석권 — 2003년 벤틀리 Speed 8은 전설의 완성이었다.

Speed 8 주요 제원 (2003)
엔진: 4.0리터 트윈터보 V8 / 최고출력: 약 600마력 / 변속기: 6단 수동 시퀀셜 / 차체: 카본파이버 복합소재 / 분류: 르망 프로토타입(LMP900) / 팀: Team Bentley (공식 명칭). 이 머신은 아우디 R8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개발됐으며, 벤틀리 그린 컬러와 고유 보디키트가 적용됐다.

벤틀리 GT 레이스 — 헤리티지를 이어가는 방식

벤틀리 르망
벤틀리 르망 · 사진 Ben from LONDON, United Kingdom,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2003년 르망 LMP 우승 이후 벤틀리는 프로토타입 레이스에서 물러났지만, 레이싱 DNA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컨티넨탈 GT3라는 GT 레이스카가 그 다음 챕터를 열었다. 컨티넨탈 GT3는 2013년 파리 오토살롱에서 처음 공개됐고, 이후 블랜팽 GT 시리즈, 스파 24시, 두바이 24시 등 다양한 GT 내구레이스에 투입됐다. LMP와 달리 GT 레이스카는 양산차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컨티넨탈 GT3의 활약은 벤틀리 도로 주행 차량과 레이스카 사이의 연결고리를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주었다.

컨티넨탈 GT3는 4.0리터 트윈터보 V8을 탑재하고 약 550마력의 출력을 낸다. 무게는 양산 컨티넨탈 GT보다 대폭 줄였지만, 육중한 GT 레이스카의 특성상 순수 경량 프로토타입보다는 느리다. 그러나 그 특유의 존재감 — 보닛 위로 치솟는 특유의 실루엣, 낮은 배음의 엔진 사운드 — 은 그 어떤 레이스카와도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팬들이 벤틀리 GT3를 ‘달리는 예술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한편 벤틀리는 2010년대 후반부터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전동화 전환 과제와 씨름하게 됐다. 2019년 벤틀리는 2030년까지 전 라인업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또는 순수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전환이 레이싱 프로그램에 어떤 형태로 반영될지는 아직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지만, 벤틀리 팬들 사이에서는 전기화된 벤틀리가 르망 하이퍼카(LMH) 클래스에 도전하는 미래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한국 렌즈 — 서울의 벤틀리와 르망의 감성

한국에서 벤틀리는 단순한 수입 럭셔리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폭스바겐그룹코리아가 공식 운영하는 벤틀리 서울, 벤틀리 부산, 벤틀리 대구 등의 딜러십은 벤틀리의 역사와 모터스포츠 헤리티지를 고객 경험과 연결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꾸준히 전개해왔다. 벤틀리 서울 공식 채널은 1920년대 르망 우승과 2003년 Speed 8 복귀 스토리를 콘텐츠화하며 한국 팬들에게 브랜드의 레이싱 DNA를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모터스포츠 팬층은 F1에서 WEC(세계내구선수권)까지 폭넓게 관심을 확장하고 있다. 특히 르망 24시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시리즈 ‘르망: 레이싱의 전설’이 공개된 이후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높아졌고,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벤틀리 르망 클래식 영상을 찾아보는 국내 팬도 늘어나고 있다. 벤틀리 코리아 역시 유튜브 채널을 통해 ‘Bentley Boys 시대’와 ‘르망 재패 시절’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제작·공유하고 있다.

국내 GT 레이스 문화도 서서히 성숙해가고 있다. CJ 슈퍼레이스 GT 클래스와 아시아 GT 시리즈 무대에서 국내 드라이버들이 활약하는 가운데, 벤틀리 컨티넨탈 GT3처럼 럭셔리 브랜드의 GT 레이스카가 아시아 무대에서 어떤 존재감을 보여줄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Bentley Boys의 ‘신사적 레이서’ 정신은 스피드와 품격을 동시에 중시하는 한국 모터스포츠 팬들에게도 충분히 공명하는 서사다.

전설이 묻는 것 — 속도는 품격을 이길 수 없다

벤틀리 르망
벤틀리 르망 · 사진 Martin Lee from London, UK,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벤틀리 르망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왜 우리는 100년 전 신사들의 질주를 아직도 이야기하는가?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Bentley Boys는 단순히 빠른 차를 몰았던 게 아니라, 자신들의 방식으로 속도를 정의했다. 과속도 불안도 아닌, 계산된 용기와 절제의 속도. 그것이 그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다.

2003년 Speed 8의 귀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르망 LMP 클래스는 아우디가 지배하고 있었고, 기술적으로 아우디 R8의 플랫폼을 공유한 Speed 8이 ‘진정한 독자 우승인가’라는 논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벤틀리 팬들은 그런 논쟁보다 녹색 머신이 결승선을 처음 통과하던 순간의 감동을 기억한다. 기술의 출처보다 그 기술을 어떤 이름과 정신으로 완성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르망은 지금도 진화 중이다. 수소 연료전지, 전동화 하이퍼카, 자율주행 기술이 미래의 르망을 예고하고 있다. 벤틀리가 그 미래의 르망에 다시 설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어떤 기술이 르망을 지배하더라도, Bentley Boys가 녹색 레이서를 몰고 사르트의 새벽을 가르던 그 서사는 모터스포츠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 팬의 시선

한국에서 벤틀리는 럭셔리 GT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브랜드의 본질은 레이스트랙에서 출발했다. 폭스바겐그룹코리아 공식 채널과 벤틀리 서울 소셜미디어는 1920년대 르망 5회 우승과 2003년 Speed 8 복귀 스토리를 꾸준히 콘텐츠화하며 한국 팬들과 레이싱 헤리티지를 공유하고 있다. 르망 24시에 대한 한국 팬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 Bentley Boys의 서사는 단순한 자동차 역사가 아니라 속도와 품격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이야기로 새롭게 읽힌다.

1924년 첫 우승부터 2003년 Speed 8까지, 벤틀리가 르망에서 써내려간 서사는 단 한 가지 진실을 반복한다. 진정한 속도는 두려움에서 오지 않는다. 절제된 용기, 정밀한 준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신뢰 — 그것이 Bentley Boys가 사르트의 새벽을 이기게 한 힘이었다. 오늘 밤 르망의 직선로 어딘가에서, 아직 우리는 그 녹색 실루엣의 엔진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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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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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틀리 르망 — Brian Snelson,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벤틀리 르망 — | El Caganer / Craig Howell,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벤틀리 르망 — Mike Roberts from London, United Kingdom,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 벤틀리 르망 — Ben from LONDON, United Kingdom,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 벤틀리 르망 — Martin Lee from London, UK,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