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키미 라이코넨 — 무심함 뒤에 감춰진 아이스맨의 속도

그는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법이 없었고, 카메라 앞에서 미소 짓는 일도 드물었다. 하지만 헬멧을 쓰고 시동을 걸면, 키미 라이코넨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이 됐다. 말보다 랩타임이 먼저였던 아이스맨의 전설을 지금 다시 꺼내 본다.

3줄 요약
1키미 라이코넨은 349번의 공식 F1 레이스에 출전해 2007년 단 하나의 드라이버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2커리어 초반 맥라렌 시절의 날카로운 스피드와 두려움 없는 드라이빙은 그를 세대를 대표하는 재능으로 각인시켰다.
3무뚝뚝한 언행과 독특한 캐릭터는 오히려 전 세계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 낸 역설적인 매력이 됐다.

이 글은 키미 라이코넨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F1의 아이콘이 됐는지를 따라간다. 수치와 기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의 매력, 커리어의 굴곡과 부활, 그리고 무심함이라는 가면 뒤에 존재했던 순수한 속도에 대한 열망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트로피 개수가 위대함의 척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라이코넨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한눈에 보는 키미 라이코넨
본명키미 마티아스 라이코넨 (Kimi Matias Räikkönen)
출생1979년 10월 17일, 핀란드 에스포
F1 데뷔2001년 호주 그랑프리 (자우버)
공식 레이스 출전349회
드라이버 챔피언십2007년 (페라리)
키미 라이코넨
키미 라이코넨 — 무심함 뒤에 감춰진 아이스맨의 속도 · 사진 Thom May,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핀란드 설원에서 태어난 속도 본능

1979년 10월, 핀란드의 항구도시 에스포에서 태어난 키미 마티아스 라이코넨은 어린 시절부터 카트에 빠져들었다. 핀란드는 미카 하키넨, 케케 로스베르그 같은 세계 챔피언을 배출한 나라다. 라이코넨 역시 그 전통 위에서 자랐지만, 그의 성장 배경은 화려한 아카데미나 대형 스폰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족의 금전적 지원에 의존해 카트 대회를 전전하며 재능을 갈고닦았다.

카트에서의 성과는 빠르게 눈에 띄었다. 유럽 슈퍼A 카트 챔피언십에서의 활약은 상위 포뮬러로 가는 발판이 됐다. 하지만 라이코넨의 싱글시터 경험은 당시 기준으로 놀라울 만큼 짧았다. 그가 F1에 데뷔할 시점, 포뮬러 레노 시즌 단 하나가 전부였다. FIA는 그의 슈퍼라이선스 발급을 두고 고민했고, 자우버 팀의 간곡한 설득이 없었다면 데뷔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001년 호주 그랑프리, 라이코넨은 단 23번의 단일시터 레이스 경험을 가지고 F1 그리드에 섰다. 그리고 포인트를 득점했다. 전문가들은 놀랐고, 일부는 ‘운’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시즌이 진행될수록 그것이 운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핀란드의 설원 위에서 다듬어진 속도 본능은 F1의 아스팔트 위에서도 정확하게 작동했다.

핀란드의 F1 전통
핀란드는 인구 대비 F1 챔피언을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케케 로스베르그(1982), 미카 하키넨(1998, 1999), 키미 라이코넨(2007)이 모두 핀란드 출신이다. 세 챔피언 모두 특유의 차갑고 집중된 드라이빙 스타일을 공유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맥라렌의 번개 — 커리어 초반의 찬란한 빛

키미 라이코넨
키미 라이코넨 · 사진 Xavigivax,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2002년, 자우버에서의 활약을 본 맥라렌은 라이코넨을 영입했다. 당시 맥라렌은 미카 하키넨이 은퇴한 뒤 데이비드 쿨트하드와 함께 새로운 조각을 찾고 있었다. 스물두 살의 라이코넨은 쿨트하드의 팀메이트로 실버 화살의 조수석에 탑승했고, 첫 시즌부터 팀 내 1번 드라이버가 누구인지를 랩타임으로 묻기 시작했다.

2003년 시즌은 라이코넨의 이름을 세계 최정상 드라이버의 반열에 올려놓은 해였다. 미하엘 슈마허와 페라리가 지배하던 시대, 라이코넨은 맥라렌 MP4-17D와 MP4/18 등 다소 불안정한 기계를 몰면서도 챔피언십 경쟁을 마지막 라운드까지 이어갔다. 시즌 최종전까지 슈마허와의 포인트 차는 단 2점. 드라마 같은 시즌이었다.

2005년에는 더욱 폭발적인 모습을 보였다. 맥라렌 MP4/20을 타고 단 2번의 드라이버 은퇴를 기록하며 7승을 수확했다. 시즌 초반의 압도적인 페이스는 많은 이들에게 라이코넨이 그해 챔피언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줬다. 그러나 시즌 후반 기계적 신뢰성 문제가 발목을 잡으며 결국 르노의 페르난도 알론소에게 챔피언십을 내줬다. ‘아이스맨’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지만, 랩타임은 뜨거운 분노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2003년 시즌, 라이코넨은 챔피언십을 단 2점 차로 놓쳤다. 기계가 허락했다면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른다.

맥라렌 MP4/20 — 빠르지만 취약했던 걸작
2005년 맥라렌 MP4/20은 단일 랩 속도에서 시즌 최강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신뢰성 문제로 라이코넨은 여러 차례 리타이어를 겪었고, 결국 챔피언십을 알론소에게 넘겨줬다. 빠르지만 완결되지 않은 기계의 상징으로 F1 역사에 기억된다.

2007년, 마지막 코너에서 얻어낸 챔피언십

2007년은 라이코넨에게 F1 커리어의 정점이자, 가장 극적인 서사가 펼쳐진 해였다. 페라리로 이적한 첫 시즌, 그는 팀메이트 펠리페 마사와 함께 수페르스쿠데리아의 붉은 머신을 몰았다. 시즌 대부분을 루이스 해밀턴과 페르난도 알론소가 앞서 달렸고, 라이코넨은 시즌 후반까지 챔피언십 선두 자리를 내준 상태였다.

브라질 인테르라고스에서 열린 최종전, 라이코넨은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는 챔피언이 될 수 없었다. 해밀턴과 알론소의 성적에 따라 복잡한 계산이 엮여 있었다. 라이코넨은 폴포지션에서 출발해 선두를 유지했고, 해밀턴의 기어박스 문제와 알론소의 성적 부진이 겹치며 믿기 어려운 결과가 탄생했다. 최종 포인트 집계 결과, 라이코넨은 단 1점 차이로 두 라이벌을 모두 제치고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시상대에서의 라이코넨은 여느 챔피언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하늘을 향해 두 주먹을 치켜들지 않았다. 특유의 무표정 속에 가느다란 미소가 번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미소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처럼 느껴진 것은, 그가 온 시즌 동안 얼마나 소리 없이 격렬하게 달렸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챔피언십 역사상 가장 劇的인 역전 드라마 중 하나로 지금도 회자된다.

‘해봤는데 됐어요.’ 라이코넨의 가장 유명한 무전은 챔피언십 직후의 장황한 세리머니 대신, 단 몇 글자로 그의 철학을 요약했다.

2007 브라질 GP — 수치로 보는 극적인 역전
최종전 시작 당시 라이코넨은 해밀턴에게 17포인트 뒤진 3위였다. 단 한 번의 레이스로 역전이 가능한 상황이 되려면 해밀턴이 8위 이하로 마쳐야 했다. 해밀턴의 기어박스 이상으로 실제 그 시나리오가 펼쳐졌고, 라이코넨은 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해 110점으로 공동 2위 해밀턴과 알론소(각 109점)를 1점 차로 앞섰다.

페라리 시절 이후 — 랠리, 복귀, 그리고 긴 여정

키미 라이코넨
키미 라이코넨 · 사진 No machine-readable author provided. Ygrek assumed (based on copyright claims).,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2009년, 라이코넨과 페라리는 함께하는 마지막 시즌을 맞이했다. 팀은 라이코넨에게 2010년 계약 해지를 제안했고, 그는 이를 수용했다. 그가 선택한 다음 무대는 F1이 아니라 월드 랠리 챔피언십이었다. 일부는 커리어의 후퇴라고 해석했지만, 라이코넨에게 그것은 또 다른 속도와의 대화였다. 시트로엥 팀을 통해 WRC에 참가한 그는 몇 차례 입상하며 랠리에서도 위협적인 속도를 보였다. 다만 세계 최정상 랠리 드라이버들과의 경쟁에서 결과는 제한적이었다.

2012년, 라이코넨은 F1으로 복귀했다. 로터스 팀을 통한 귀환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빗나갔다. 최정상 팀이 아닌 중위권 팀을 선택한 것은 라이코넨답게 조용하고 대담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2012년 압부다비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거머쥐었고, F1 최정상의 실력이 조금도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2013년에는 8번의 포디움에 오르며 드라이버스 챔피언십 3위를 기록했다.

2014년, 라이코넨은 페라리로 다시 돌아왔다. 팀메이트는 페르난도 알론소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커리어에서 가장 어려운 장면 중 하나로 기록됐다. 차의 성능 자체가 메르세데스에 미치지 못했고, 알론소와의 경쟁에서도 뚜렷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2014, 2015년 두 시즌 동안 라이코넨은 ‘아이스맨’이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고전했다. 그럼에도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차에 올라타고, 달렸고,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Leave me alone, I know what I’m doing.

— 키미 라이코넨 — 2012년 아부다비 그랑프리 팀 무전 중

알파 로메오, 그리고 349번째 레이스

페라리를 떠난 뒤 라이코넨은 알파 로메오(구 자우버) 팀에서 커리어의 마지막 장을 썼다. F1 커리어를 시작했던 팀의 후신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은 어떤 의도된 서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그는 알파 로메오의 에이스이자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젊은 팀메이트들에게는 말 없는 선생님이었고, 기술 개발에 있어서는 여전히 쓸모 있는 피드백을 전달하는 드라이버였다.

2021년 이탈리아 그랑프리를 앞두고, 라이코넨은 코로나19 확진으로 결장을 발표했다. 그해 11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42세의 나이로 F1 역사상 가장 많은 레이스에 출전한 드라이버 중 한 명으로서 그리드를 떠났다. 마지막 레이스가 기껏해야 중위권 팀의 포인트 다툼이었다는 사실은, 화려한 퇴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라이코넨다운 마무리였다.

349번의 레이스. 그 숫자 안에는 챔피언십 역전 드라마도, 비 내리는 인터라고스의 우승도, 랠리 트랙의 흙먼지도, 팬들과의 수많은 엇갈린 눈빛도 모두 담겨 있다. 1점짜리 챔피언십과 달리, 그의 레이스 하나하나는 각자의 이야기를 가진 짧은 소설이었다. ‘아이스맨’이라는 별명은 처음에는 차가운 성격에서 나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혼란 속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의 상징이 됐다.

커리어의 시작점이었던 자우버의 후신에서 마침표를 찍은 것, 의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서사는 완결처럼 느껴진다.

알파 로메오 레이싱 — 자우버의 계보
라이코넨이 2001년 데뷔했던 자우버 팀은 이후 BMW자우버, 자우버, 알파 로메오 레이싱으로 이름을 바꾸며 F1에 남아 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라이코넨이 이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한 것은 그가 처음 그랑프리 세계에 발을 들였던 곳과 같은 뿌리에서 떠나는 이야기다.

무심함이라는 예술 — 아이스맨 캐릭터의 재해석

키미 라이코넨
키미 라이코넨 · 사진 Gil Abrantes from Portugal,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키미 라이코넨을 단지 뛰어난 드라이버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절반을 놓치는 일이다. ‘아이스맨’이라는 캐릭터는 F1 역사에서 전례가 드문 형태의 아이콘이었다. 인터뷰에서 짧게 대답하고, 시상대에서 샴페인을 뿌리기보다는 마셨으며, 자신에게 주목하는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피했다. 이런 태도는 일반적으로 팬들로부터 거리를 만들지만, 라이코넨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그의 무전 발언들은 인터넷 문화에서 밈(meme)이 됐다. ‘스톱! 스탑 더 카! 저기, 나 지금 공원이야(Leave me alone, I know what I’m doing)’는 팬들 사이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이 됐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차를 세우고 요트 파티를 즐긴 일화, 기자들의 질문에 단 두 마디로 종결시키는 인터뷰들은 하나하나가 콘텐츠가 됐다. 그는 자신을 브랜딩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가장 독보적인 브랜드가 됐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라이코넨의 태도는 외부 소음을 차단하는 고도의 집중 상태와 맥락이 닿아 있다. 그는 언론의 평가나 팀 내 정치에 에너지를 쓰지 않았다. 그 에너지는 오롯이 운전에만 집중됐다. 커리어 초반 그를 곁에서 지켜본 엔지니어들은 라이코넨이 레이스 중 특정 상황에서 보여주는 직관적 판단력과 차량 피드백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외부에서 보이는 무심함과, 차 안에서 발현되는 예민한 감각은 하나의 인간 안에 공존하는 두 얼굴이었다.

‘Leave me alone, I know what I’m doing.’ — F1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전 중 하나는 그의 인생 철학이기도 했다.

위대함의 기준 — 라이코넨은 얼마나 위대했는가

라이코넨을 F1 역대 최고의 드라이버 목록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오래됐다. 단 하나의 챔피언십은 슈마허의 7회, 해밀턴의 7회, 세나의 3회와 비교하면 수치상으로 초라해 보인다. 커리어 후반의 성적만 놓고 본다면 ‘전성기가 지난 챔피언’이라는 평가를 받을 여지도 있다. 커리어를 넓게 조망하는 이들은 라이코넨이 역대 최고의 드라이버는 아니지만, 커리어 초반에는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없이 빠르고 두려움 없는 드라이버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숫자만으로 위대함을 재단하는 것은 라이코넨에게 특히 어울리지 않는 잣대다. 그가 맥라렌에서 보여준 두 시즌(2003, 2005)은 더 좋은 기계가 주어졌다면 챔피언십 개수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 로터스로 복귀한 2012, 2013년의 성적은 그 나이에, 그 수준의 장비로, 그만한 결과를 낼 수 있는 드라이버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보여줬다. 전성기의 라이코넨은 동시대의 슈마허, 알론소, 해밀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속도를 가졌다고 보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

어쩌면 라이코넨의 가장 큰 유산은 F1이 결코 완전히 구현하지 못한 ‘순수한 드라이버’의 이미지일지 모른다. 그는 팀 내 정치, 미디어 전략, 스폰서 행사에 최소한의 에너지를 쏟고, 나머지 전부를 달리는 것에 바쳤다. 그 모습은 오늘날 고도로 브랜딩된 F1 생태계에서 점점 희귀해지고 있는, 어쩌면 다시 보기 어려운 드라이버상이다.

F1 명예의 전당(Hall of Fame) 논의
국제 자동차 연맹(FIA) 공식 명예의 전당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국 ‘F1 Racing’ 매거진 등이 주관하는 비공식 드라이버 랭킹에서 라이코넨은 꾸준히 상위권에 포함된다. 349번의 출전, 21번의 우승, 103번의 포디움 기록은 어떤 기준으로도 무시하기 어렵다.

한국 팬들이 기억하는 아이스맨

한국에서 키미 라이코넨은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2010년대 초반 F1이 한국 인터넷 문화에 본격적으로 침투했을 때, 라이코넨의 무전 클립과 인터뷰 영상은 국내 커뮤니티에서 빠르게 확산됐다. 젠체하지 않고, 꾸미지 않으며, 묻는 말에 최소한으로 대답하는 그의 태도는 한국식으로 말하면 ‘쿨함’의 정수였다. F1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아이스맨’의 클립을 보고 웃었다.

한국 그랑프리가 열렸던 시기(2010~2013년,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에 라이코넨은 로터스 소속으로 참가했다. 전남 영암의 서킷에서 빠르게 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당시 현장을 찾은 한국 팬들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F1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 시도하던 시기, 라이코넨은 그 장면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

라이코넨이 은퇴를 발표한 2021년, 한국의 F1 팬 커뮤니티는 그 어느 드라이버의 은퇴보다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를 F1에 입문하게 한 계기로 꼽는 한국 팬들이 적지 않았고, 그의 무전과 인터뷰를 모아 놓은 유튜브 편집 영상들은 수십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르지만 ‘자기 일을 묵묵히 가장 잘하는 사람’에 대한 보편적 감동이 국경을 넘었다.

한국 팬의 시선

한국 팬들에게 키미 라이코넨은 단순한 F1 드라이버 이상의 존재였다. 2010년대 초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유행했던 그의 무전 클립과 짤막한 인터뷰 영상은 F1이라는 스포츠를 처음 접하게 만든 입구 역할을 했다. 전남 영암에서 열렸던 한국 그랑프리 시절, 로터스 소속으로 서킷을 내달리던 라이코넨의 모습은 그 시절 F1을 현장에서 처음 경험한 팬들의 가슴속에 각인됐다. 말보다 행동, 포장보다 본질을 중요시하는 그의 태도는 어떤 문화권에서도 통하는 언어였고, 한국의 많은 젊은 팬들은 그 속에서 진정성의 서사를 읽었다.

아이스맨은 이미 그리드를 떠났다. 349번의 레이스가 만들어 낸 이야기는 이제 아카이브 속에 있지만, 그 서사는 여전히 살아있다. 무심한 표정 뒤에 얼마나 깊은 속도에 대한 열망이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키미 라이코넨의 이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철학으로 남아 있다. 세상이 아무리 떠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차에 타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간이 됐던 그. 그의 목소리는 짧았지만, 그가 남긴 잔향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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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출처

이미지 크레딧
  • 키미 라이코넨 — Thom May,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키미 라이코넨 — Xavigivax,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 키미 라이코넨 — No machine-readable author provided. Ygrek assumed (based on copyright claims).,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 키미 라이코넨 — Gil Abrantes from Portugal,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