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모나코 그랑프리: 화려함 뒤에 숨겨진 100년의 역사

세상에서 가장 느리고, 가장 좁고, 가장 위험한 F1 서킷 — 그럼에도 모든 드라이버가 평생 한 번은 이기고 싶어 하는 레이스가 있다. 모나코 그랑프리다. 요트와 샴페인, 카지노와 왕족이 뒤섞인 화려한 외양 아래, 이 레이스는 놀랍도록 치열하고 놀랍도록 슬픈 역사를 품고 있다.

3줄 요약
1모나코 그랑프리는 1929년 첫 개최 이후 9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F1의 3대 그랑프리 중 하나로 꼽힌다.
2아이르통 세나, 그레이엄 힐 등 전설적 드라이버들의 신화적 기록이 이 서킷에서 탄생했다.
3단순한 속도 경쟁을 넘어 시가지 서킷의 특성상 인내, 정밀성, 집중력이 승패를 가르는 독보적인 무대다.

이 글은 모나코 그랑프리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전쟁과 비극과 영광을 거치며 어떤 레이스로 진화해왔는지를 시간 순서와 이야기의 결을 따라 추적한다. 속도보다 정밀함이 중요한 이 좁은 해안 도로에서,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서사를 함께 따라가 보자.

한눈에 보는 모나코 그랑프리
첫 개최 연도1929년
서킷 총 길이약 3.337km (시가지 서킷)
레이스 총 거리약 260km (78랩)
최다 우승 드라이버아이르통 세나 (6회)
별칭‘왕관의 보석(Jewel in the Crown)’
모나코 그랑프리
모나코 그랑프리: 화려함 뒤에 숨겨진 100년의 역사 · 사진 Iwao from Tokyo, Japan,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1929년, 지중해 절벽 위에서 시작된 꿈

모나코 그랑프리의 출발점은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토모빌 클럽 드 모나코(Automobile Club de Monaco)의 창립자이자 열렬한 레이싱 팬이었던 앙토니 노게스(Antony Noghès)는 지중해를 바라보는 이 작은 공국의 좁은 도로들을 레이싱 코스로 탈바꿈시키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현대적인 의미의 레이스 서킷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도심 도로 위에서 자동차들이 질주한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다.

1929년 4월 14일, 역사적인 첫 번째 모나코 그랑프리가 개최됐다. 우승자는 영국 드라이버 윌리엄 그로버 윌리엄스(William Grover-Williams)로, 그는 부가티(Bugatti)를 몰아 약 3시간 56분 만에 코스를 완주했다. 관중들은 발코니와 항구의 요트에서 레이스를 내려다봤고, 이 광경은 훗날 모나코 그랑프리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굳어졌다. 처음부터 이 레이스는 단순한 자동차 경주 이상의 ‘이벤트’였다.

모나코 공국이라는 지리적 특수성도 이 레이스를 독특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면적이 약 2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인 모나코는, 역설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모터스포츠 이벤트의 무대가 됐다. 언덕과 절벽, 터널과 항구가 뒤섞인 독특한 지형은 이 서킷을 다른 어느 F1 트랙과도 다른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앙토니 노게스와 모나코 왕실
앙토니 노게스는 모나코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랑프리 개최를 성사시켰다. 모나코 왕실은 이후에도 이 레이스의 후원자이자 상징적 존재로 남아 있으며, 레이스 우승자에게는 왕족이 직접 트로피를 수여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이 빼앗아 간 시간, 그리고 부활

모나코 그랑프리
모나코 그랑프리 · 사진 Agence de presse Meuriss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929년 시작된 모나코 그랑프리는 1930년대를 거치며 유럽 모터스포츠의 중심 이벤트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는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와 아우토 우니온(Auto Union)이 이끄는 독일 머신들이 유럽 그랑프리 레이싱을 지배했고, 모나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은빛 머신들의 질주는 오래가지 못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모나코 그랑프리는 약 10년 간의 긴 공백기에 들어갔다.

전쟁이 끝난 뒤 1948년, 모나코 그랑프리는 조용히 부활했다. 온전히 파괴되지 않은 도로와 다시 불붙기 시작한 유럽 모터스포츠의 열기가 이 부활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1950년, FIA가 공식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을 창설하면서 모나코는 초창기 F1 캘린더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다만 초기에는 매년 개최되지 않았고, 1955년까지는 불규칙적으로 열리다가 1955년 이후 정기적인 F1 라운드로 자리를 잡았다.

전후 첫 번째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서킷의 기본 레이아웃이 놀랍도록 원형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물론 안전 시설과 피트레인의 구조는 시대에 따라 꾸준히 개선됐지만, 생 드보테(Sainte Dévote) 코너에서 시작해 카지노 광장을 지나고, 미라보(Mirabeau)와 그랑 오텔(Grand Hôtel) 헤어핀을 통과하며, 수영장 구역(Piscine)을 지나 항구를 바라보는 라스카스(La Rascasse) 코너로 돌아오는 기본적인 흐름은 수십 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바로 이 연속성이 모나코 그랑프리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으로 만든다.

‘미스터 모나코’ 그레이엄 힐과 황금기의 영웅들

1960년대는 모나코 그랑프리의 진정한 황금기라 부를 만하다. 이 시기에 이 레이스와 함께 전설이 된 드라이버가 바로 영국의 그레이엄 힐(Graham Hill)이다. 힐은 1963년부터 1969년까지 모나코에서 무려 5회 우승을 달성하며 ‘미스터 모나코(Mr. Monaco)’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모나코 지배는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힐은 반복적인 주행과 철저한 분석을 통해 이 서킷의 구석구석을 꿰뚫었고, 레이스 중 어느 순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힐의 시대와 겹쳐 1960년대 모나코에는 짐 클라크(Jim Clark), 존 서티스(John Surtees), 요헨 린트(Jochen Rindt) 등 당대 최고의 드라이버들이 격전을 벌였다. 특히 코스워스 DFV 엔진이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는 더 많은 팀이 경쟁력을 갖추게 됐고, 레이스는 한층 더 치열해졌다. 모나코는 빠른 서킷이 아니었지만, 그 좁은 도로 위에서의 한 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정밀함은 최고의 드라이버들을 더욱 빛나게 했다.

1960년대 모나코 그랑프리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장면은 바로 관중의 모습이다. 항구에 정박한 럭셔리 요트들, 카지노 주변에 모여든 유럽 귀족과 셀러브리티들, 그리고 테라스에서 샴페인을 들고 레이스를 지켜보는 사람들 — 이 풍경은 모나코 그랑프리가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하나의 사교 행사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 형성된 이미지는 오늘날까지도 모나코 그랑프리의 DNA를 이루고 있다.

‘미스터 모나코’ 그레이엄 힐은 이 좁은 도시에서 다섯 번의 승리를 거두며, 인간이 서킷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아이르통 세나: 모나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남자

모나코 그랑프리의 역사에서 아이르통 세나(Ayrton Senna)를 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브라질 출신의 이 드라이버는 1984년부터 1993년까지 모나코에서 여섯 번 우승하며 그레이엄 힐의 5회 기록을 넘어섰다. 그의 모나코에서의 지배는 단순한 통계를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세나 자신도 여러 인터뷰에서 모나코 서킷을 달릴 때 자신과 자동차와 도로가 하나가 되는 특별한 감각을 경험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세나의 모나코 이야기에는 영광만큼이나 깊은 상처도 있다.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는 세나의 신화가 잉태된 레이스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장 아픈 기억 중 하나다. 당시 토레만(Toleman) 소속으로 출전한 세나는 비가 쏟아지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 선두를 달리던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를 맹렬히 추격했다. 세나가 프로스트와의 간격을 무섭게 좁혀가던 바로 그 순간, 레이스 디렉터는 적기(赤旗)를 꺼내 레이스를 중단시켰다. 세나는 이 결정에 크게 실망했고, 이 사건은 두 드라이버의 오랜 라이벌 관계의 서막이 됐다.

1992년 모나코 그랑프리는 세나 신화의 또 다른 정점이었다. 나이젤 만셀(Nigel Mansell)의 윌리엄스-르노가 그 시즌 압도적인 지배력을 자랑하던 가운데, 세나는 피트스톱 타이밍의 역전을 이용해 순위를 빼앗기고도 마지막 랩에서 기계적 트러블로 서행하는 만셀을 추월하며 우승했다. 이 결말은 세나의 모나코 장악력이 단순한 속도를 넘어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세상에 각인시켰다. 1993년의 여섯 번째 우승 이후, 1994년 이몰라(Imola)의 비극이 세나를 영원히 앗아갔다. 그의 여섯 번의 모나코 우승은 지금도 최다 기록으로 남아 있다.

세나가 모나코에서 남긴 유산은 기록 이상이다. 그는 이 서킷이 요구하는 것, 즉 끝없는 집중력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용기, 그리고 물리적 한계에 가까운 정밀함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줬다. 오늘날 F1 드라이버들이 모나코에서 우승했을 때 가장 먼저 세나를 언급하는 것은 단순한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이 서킷이 그의 혼으로 채워져 있음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1984년 모나코 적기 논란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는 폭우 속에서 세나가 프로스트를 거의 따라잡았을 때 적기가 제시되며 중단됐다. 이 결정의 타당성은 지금도 논쟁거리다. 당시 중단 시점의 순위가 공식 결과로 채택되어 프로스트가 우승자가 됐고, 세나는 2위에 그쳤다.

모나코에서 달릴 때, 나는 어딘가 다른 경지에 있었다. 나 자신이 어떤 힘에 의해 이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 아이르통 세나 /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 이후 인터뷰에서 전해지는 발언

비극과 안전: 모나코가 치른 대가

화려함으로 포장된 모나코 그랑프리이지만, 이 레이스의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도심 시가지를 달리는 서킷의 특성상 가드레일과 절벽과 터널이 코스 바로 옆에 있었고, 초창기부터 여러 중대한 사고들이 발생했다. 1955년에는 이 레이스에서 중대한 사고가 있었고, 1967년에는 로렌조 반디니(Lorenzo Bandini)가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반디니는 치커인 구간에서 사고가 난 뒤 화재로 이어지는 참사를 겪었으며, 이 사건은 F1 전반의 안전 기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F1은 안전 장비와 서킷 설비 면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모나코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러 구간의 가드레일이 현대적인 타이어 배리어와 TecPro 배리어로 교체됐고, 탈출 구역이 확보되기 어려운 일부 코너는 레이아웃 자체가 미세하게 수정됐다. 피트레인 구조도 현대적인 기준에 맞게 재설계됐다. 이 모든 변화는 모나코의 본질적인 도전성과 좁은 도로를 유지하면서도 드라이버의 생존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려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안전 문제와 함께 모나코 그랑프리가 꾸준히 받아온 비판 중 하나는 실제 레이스 중 추월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코스가 좁고 느린 코너들로 가득 차 있어, 예선 순위 그대로 레이스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모나코가 순수한 레이싱 이벤트로서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좁은 도로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긴장감, 선두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스릴은 다른 서킷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긴장을 제공한다.

모나코는 추월이 거의 없는 레이스다. 그런데도 78랩 내내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한 순간의 실수가 전부를 바꾸기 때문이다.

서킷의 해부: 카지노에서 터널까지, 모나코 코너 하나하나의 이야기

모나코 서킷을 한 바퀴 돌면, 다른 어떤 F1 코스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형적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레이스는 그리드에서 출발해 생 드보테(Sainte Dévote) 코너를 통과하면서 시작된다. 성녀 드보테에게 바쳐진 이 코너는 급격한 우회전이며, 스타트 직후 여러 차량이 밀집하는 관계로 개막 랩의 사고 다발 지점으로 악명 높다. 이 코너를 지나면 가파른 언덕을 올라 카지노 광장(Casino Square)에 이른다.

카지노 광장을 지나 미라보(Mirabeau) 코너와 로에우(Loews, 현재는 ‘그랑 오텔 헤어핀’으로도 불림) 헤어핀을 차례로 통과하게 된다. 로에우 헤어핀은 F1 캘린더 전체에서 가장 느린 코너 중 하나로, 드라이버들은 이 지점에서 시속 50킬로미터 안팎으로 속도를 줄여야 한다. 좁은 도로와 가파른 경사가 결합된 이 구간은 브레이킹 포인트와 노즈 각도 하나하나가 레이스의 흐름을 바꾼다. 이곳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의 실수가 가드레일 접촉으로 이어지고, 레이스 전략 전체를 허물어뜨릴 수 있다.

가장 극적인 구간은 역시 터널(Tunnel)이다. 모나코 서킷의 상징적 장면인 터널 구간에 진입하는 드라이버들은 눈부신 햇빛 아래서 갑자기 어둠 속으로 뛰어들며 순간적으로 시야가 바뀌는 경험을 한다. 터널 안에서 머신은 최고 속도에 가깝게 가속하고, 출구에서 다시 빛 속으로 나오며 즉각적으로 시커인 헤어핀(Chicane)을 대비해야 한다. 이 전환의 속도와 강도는 드라이버의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다. 터널 바깥으로 나오면 항구가 보이고, 뉴 피트레인(New Pits)과 수영장 구역(Piscine)을 거쳐 라스카스(La Rascasse) 코너를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모나코 서킷의 최고 속도
모나코 서킷의 최고 속도는 F1 캘린더 중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하지만, 평균 랩 속도는 여전히 시속 150킬로미터 이상이다. 여기에 도로와 가드레일 사이의 마진이 극히 좁다는 점이 결합되어, 드라이버들이 느끼는 체감 위험도는 훨씬 빠른 고속 서킷 못지않다.

현대의 모나코 그랑프리: 비판과 재발견 사이에서

2010년대 이후 모나코 그랑프리를 둘러싼 논의는 복잡해졌다. F1 머신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운포스와 타이어 기술이 극도로 정교해졌고, 그 결과 이미 추월이 어려운 모나코에서는 레이스 중 순위 변동이 더욱 드물어졌다. 일부 팬들은 모나코가 이제 진짜 레이스가 아닌 퍼레이드에 가깝다고 비판했다. F1의 새로운 세대 팬들이 쇼맨십과 박진감 넘치는 오버테이크를 원하는 시대에, 모나코의 포맷이 구시대적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모나코 그랑프리는 여전히 F1 시즌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레이스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느림’과 ‘좁음’ 그 자체에 있다. 2021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레드불의 막스 페르스타펜(Max Verstappen)이 우승하며 그 시즌 타이틀 경쟁의 분수령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2022년에는 세르히오 페레스(Sergio Pérez)가 우승을 가져갔다. 각 레이스마다 예상치 못한 전략 싸움과 안전카 개입, 기상 변화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여전히 팬들을 스크린 앞에 붙들어 놓는다.

최근 F1은 모나코와의 계약 갱신 협상에서 일부 긴장감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현대 F1이 요구하는 흥행 요소와 방송 인프라, 수익 배분 구조를 두고 FOM(Formula One Management)과 모나코 측이 조율해야 할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역사적 상징성과 브랜드 가치를 고려할 때, 모나코가 F1 캘린더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시나리오는 현실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런 갈등과 긴장 자체가 이 레이스가 여전히 F1의 핵심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모나코 그랑프리는 스포츠와 문화의 교차점에 위치한다. 매년 5월 모나코 항구에 정박하는 수백 척의 슈퍼요트,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셀러브리티들, 모나코 왕실의 존재 — 이 모든 것이 레이스 주말을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하나의 글로벌 문화 현상으로 만든다. F1이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 모나코 그랑프리가 기여한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 렌즈: 모나코 그랑프리와 한국 모터스포츠 팬의 거리

한국 모터스포츠 팬들에게 모나코 그랑프리는 TV 화면과 유튜브 영상으로 접해온 꿈의 레이스다. F1이 한국에 처음 정식 소개된 것은 비교적 늦은 편이었지만,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Korea International Circuit)에서 한국 그랑프리가 열리면서 국내 팬층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 성장한 팬들이 모나코 그랑프리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세나와 슈마허, 그리고 현대 드라이버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며 F1의 역사를 학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팬들이 모나코에서 가장 많이 회자하는 장면 중 하나는 역시 세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1984년의 적기 중단, 1992년 만셀을 제친 마지막 랩의 드라마는 지금도 한국 F1 커뮤니티에서 명장면으로 꼽힌다. 또한 미하엘 슈마허(Michael Schumacher)의 모나코 기록과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의 여러 차례 우승도 한국 팬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F1 중계권 문제로 국내 방송 접근성이 시기에 따라 달라지면서 팬들이 불편을 겪기도 했지만, OTT와 유튜브를 통한 관람 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모나코 그랑프리는 여전히 한국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낳는 레이스로 자리하고 있다.

한국 모터스포츠의 미래라는 측면에서도 모나코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국내에서 카트와 포뮬러 레이싱 커리어를 쌓아가는 젊은 드라이버들에게 모나코 그랑프리는 하나의 목표이자 이정표다. 단순히 빠른 속도만이 아닌, 극한의 정밀함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 레이스는 드라이버의 본질적인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국인 드라이버가 F1의 세계에 진출해 모나코의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한국 모터스포츠 역사의 한 획이 될 것이다.

한국 팬의 시선

한국 팬들에게 모나코 그랑프리는 단순한 해외 레이스가 아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이어진 한국 그랑프리의 기억과 함께, 국내 팬층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모나코는 F1의 낭만과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세나의 드라마, 슈마허의 전략, 해밀턴의 지배력 — 이 모든 이야기들이 한국 팬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야기되는 것은 모나코가 F1이라는 스포츠의 심장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드라이버가 F1의 문을 두드리는 날, 그 여정의 종착지 중 하나는 분명 이 지중해의 좁은 도로일 것이다.

모나코 그랑프리는 매년 5월이면 지중해의 봄빛 속에서 다시 살아 숨 쉰다. 1929년 앙토니 노게스의 꿈에서 시작해, 전쟁의 상흔을 넘어, 그레이엄 힐의 지배와 세나의 신화를 거쳐, 지금 이 순간까지 — 이 레이스는 단 한 번도 ‘그냥 레이스’인 적이 없었다. 느리고 좁고 위험한 이 도로 위에서, 인간과 기계는 매번 자신의 한계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것이 바로 모나코 그랑프리가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레이스로 남아 있는 이유다. 다음 5월, 그 엔진 소리가 다시 지중해의 절벽을 울릴 때, 우리는 또 한 번 그 오래된 이야기의 새 페이지 앞에 앉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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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출처

이미지 크레딧
  • 모나코 그랑프리 — Iwao from Tokyo, Japan,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모나코 그랑프리 — Agence de presse Meurisse,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