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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드 걸은 왜 사라졌나 — 모터스포츠와 시대 변화

출발 그리드 위에 선수 번호판을 들고 서 있던 그녀들의 모습은, 한때 모터스포츠의 ‘풍경’ 그 자체였다. 그런데 2018년을 기점으로 F1 공식 그리드 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른 시리즈들도 잇달아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전통이라 불리던 것이 어느 순간 ‘시대착오’라는 단어와 함께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다.

3줄 요약
1F1은 2018시즌부터 수십 년 이어온 그리드 걸 관행을 공식 폐지했다.
2여성 권리 담론의 확산과 스폰서·팬층 변화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3폐지 이후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 전통 수호 vs. 가치관 변화의 충돌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글은 그리드 걸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탄생했고, 왜 수십 년간 모터스포츠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으며, 결국 어떤 흐름 속에서 무대를 떠나게 됐는지를 따라간다. 단순한 이벤트 스태프의 역할 변화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스포츠 산업의 상업화, 글로벌 젠더 담론의 진화, 그리고 팬과 선수·조직 사이의 복잡한 가치관 충돌이 얽혀 있다. 전통이 언제 전통이 되고, 언제 편견이 되는가 — 그 경계를 모터스포츠는 가장 드라마틱하게 통과했다.

한눈에 보는 그리드 걸 논쟁
F1 그리드 걸 공식 폐지 시점2018 시즌 개막 전 (1월 발표)
F1 그리드 걸 관행 지속 기간약 1960년대~2017년, 반세기 이상
폐지 발표 주체포뮬러 원 매니지먼트(FOM), 당시 CEO 션 브래치스
같은 해 폐지한 다른 시리즈다트(PDC 다트 월드 챔피언십) 등 비(非)모터스포츠 종목도 동참
한국 모터스포츠 관련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 등 국내 시리즈도 레이싱 모델 역할 재정의 논의 진행
그리드 걸
그리드 걸은 왜 사라졌나 — 모터스포츠와 시대 변화 · 사진 中共中央办公厅,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리드 걸의 탄생 — 속도와 글래머가 결합한 순간

모터스포츠가 대중 스포츠로 자리 잡기 시작한 1950~60년대, 레이스는 단순한 기계 경쟁 이상의 이벤트가 됐다. 관중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최 측은 볼거리를 다양화했고, 출발 그리드에서 드라이버 옆에 서서 번호판을 들거나 우승 트로피를 전달하는 역할로 젊은 여성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리드 걸의 원형이다.

당시 시대적 맥락을 무시할 수 없다. 1950~60년대 유럽과 미국의 자동차 문화는 남성 중심이었고, 광고·이벤트·모터쇼 모두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활용해 제품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이 산업 표준이었다. 그리드 걸도 이 맥락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레이스는 더 화려해졌고, 텔레비전 중계가 시작되면서 그리드 걸의 이미지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970~80년대 F1이 글로벌 프리미엄 스포츠로 도약하면서 그리드 걸의 위상도 달라졌다. 담배 회사들이 F1의 주요 타이틀 스폰서로 들어오던 시절, 레이스 그리드는 그 자체로 브랜드 쇼케이스였다. 그리드 걸은 스폰서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서서 브랜드 노출을 극대화하는 ‘살아있는 광고판’ 역할도 맡았다. 이 무렵부터 그리드 걸은 단순한 진행 보조를 넘어, 모터스포츠의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굳어졌다.

그리드 걸 vs. 레이스 모델 — 용어의 차이
엄밀히 말하면 ‘그리드 걸(Grid Girl)’은 출발 그리드에서 드라이버 번호판 등을 들고 서는 역할을 지칭한다. ‘레이스 퀸(Race Queen)’은 일본과 한국에서 주로 쓰이는 용어로, 이벤트 전반에서 홍보·모델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두 역할은 겹치지만 완전히 같지 않으며, 문화권마다 그 성격과 위상이 다르게 발전했다.

반세기의 관행 — 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나

그리드 걸
그리드 걸 · 사진 Sitomon,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수십 년간 그리드 걸이 ‘관행’으로 굳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모터스포츠 자체가 오랫동안 남성 지배적인 공간이었다. 드라이버, 엔지니어, 팀 오너, 심지어 주요 관중층까지 압도적으로 남성이었던 F1에서 여성의 역할은 오랫동안 ‘그리드 걸’처럼 보조적이고 장식적인 것으로 제한됐다. 이 구조 안에서 그리드 걸의 존재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스폰서십 경제도 중요한 배경이다. F1은 세계에서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스포츠 중 하나다. 팀을 운영하고 기술 개발에 투자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스폰서 수익이 필요하고, 스폰서들은 자사 브랜드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노출을 원했다. 그리드 걸이 스폰서 유니폼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장면은 수백만 시청자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관행을 강화한 셈이다.

또한 당시에는 이를 ‘문제’로 인식하는 사회적 언어 자체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다. 페미니즘 담론이 지금처럼 주류 공론장에 진입하지 못했던 시절, 그리드 걸에 대한 비판은 소수 의견으로 묻히기 일쑤였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이를 ‘스포츠의 전통’이자 ‘엔터테인먼트의 일부’로 받아들였고, 일부 그리드 걸 당사자들도 이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런 복잡한 층위가 쌓이면서 반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관행은 지속됐다.

‘전통’이라는 이름은 때로 변화를 막는 방어막이 된다. 모터스포츠에서 그리드 걸이 그랬다.

2018년, 결정적 전환 — F1이 그리드 걸을 폐지한 배경

2018년 1월, 포뮬러 원 매니지먼트(FOM)는 그해 시즌부터 공식 그리드 걸 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온 관행의 공식적 종료 선언이었다. FOM 측은 이 관행이 ‘현대의 사회적 규범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주요 이유로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간단한 공지처럼 보였지만, 그 뒤에는 몇 가지 중요한 흐름이 있었다.

가장 큰 배경은 2017년 말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MeToo) 운동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스포츠, 미디어, 기업 등 사회 전 영역으로 퍼지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관행에 대한 광범위한 재검토를 촉발했다. 모터스포츠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미디어와 팬들 사이에서 ‘그리드 걸 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급격히 증가했고, F1의 새 경영진은 이 흐름에 응답해야 했다.

상업적 고려도 있었다. 리버티 미디어가 2017년 F1을 인수한 이후, 새 경영진은 F1의 팬층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추진했다. 특히 여성 팬과 젊은 세대 팬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F1의 이미지를 刷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드 걸 폐지는 이런 브랜드 리포지셔닝 전략의 일환이기도 했다. F1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드라이브 투 서바이브’가 상징하듯, 리버티 미디어는 F1을 더 넓은 대중에게 열린 스포츠로 재편하려 했고, 그리드 걸 폐지는 그 과정에서 나온 상징적 결정이었다.

리버티 미디어의 F1 인수
미국 미디어 기업 리버티 미디어는 2017년 버니 에클스턴 체제의 F1을 약 80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후 F1은 디지털 미디어 확장, 미국 시장 공략, 팬층 다변화 등을 핵심 전략으로 추진했다. 그리드 걸 폐지는 이 새로운 경영 철학의 초기 시그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찬반 충돌 — 폐지를 둘러싼 목소리들

그리드 걸
그리드 걸 · 사진 Antti Leppänen, CC BY 4.0, via Wikimedia Commons

폐지 발표 이후 반응은 즉각적으로 엇갈렸다. 폐지를 환영하는 측은 그리드 걸 문화가 여성을 장식적 존재로 환원하고, 스포츠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한적으로 정의하는 구조적 문제를 강화해왔다고 주장했다. 여성이 드라이버, 엔지니어, 팀 매니저로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이런 이미지 관행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

반면 폐지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일부 그리드 걸 당사자들은 미디어와 인터뷰에서 ‘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다’고 발언해 주목받았다. 이는 단순히 보수적 반발이 아니라, 여성의 자율적 선택 vs. 구조적 성 대상화라는 페미니즘 내부의 오랜 논쟁을 건드리는 지점이었다. 무엇이 여성에게 ‘좋은 것’인지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또 다른 가부장주의는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다.

전통 수호 측의 논리도 있었다. 오랜 팬들 사이에서는 ‘그리드 걸은 모터스포츠 문화의 일부이며,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 스포츠의 매력을 해친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들은 그리드 걸 폐지가 실질적인 여성 권익 향상과는 무관한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리드 걸 논쟁은 성 평등, 직업 선택의 자유, 전통과 현대 가치관의 충돌이라는 다층적 이슈가 얽힌 복잡한 담론 공간이 됐다.

그리드 걸 폐지는 단순한 이벤트 운영 변경이 아니었다. 스포츠가 어떤 가치를 상징해야 하는가에 대한 공개 선언이었다.

그리드 걸 관행은 현대의 사회적 규범에 맞지 않는다.

— 포뮬러 원 매니지먼트(FOM), 2018년 1월 그리드 걸 폐지 발표

모터스포츠 산업의 구조 변화와 그리드 걸의 쇠퇴

그리드 걸 폐지는 단독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모터스포츠 산업 전반의 구조적 변화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F1을 비롯한 주요 시리즈들은 수십 년간 담배 스폰서, 남성 팬 중심 수익 모델, 폐쇄적 기술 커뮤니티라는 세 축 위에 서 있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이 세 축이 모두 흔들리기 시작했다.

담배 광고 규제가 전 세계적으로 강화되면서 F1의 전통적 스폰서십 모델이 붕괴했고,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으로 중계권 수익 구조도 변화했다. 스폰서들은 이제 더 다양한 소비자층에 어필하길 원하며, 특히 MZ세대 여성 소비자를 의식한다. 이런 흐름에서 그리드 걸은 새로운 스폰서들이 연상되길 원하는 이미지와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팬층의 변화도 결정적이었다. 넷플릭스 ‘드라이브 투 서바이브’ 시리즈 이후 F1의 여성 팬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는 보고들이 나왔다. 팬이 다양해질수록 스포츠는 더 넓은 가치관을 반영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그리드 걸이라는 관행은 이 새로운 팬층이 F1에 기대하는 이미지와 충돌했다. 결국 그리드 걸의 퇴장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사회적 가치관 변화가 같은 방향을 가리킨 결과였다.

같은 맥락에서 모터스포츠가 지속가능성, 다양성, 포용성을 핵심 어젠다로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F1의 ‘위 레이스 애즈 원(We Race As One)’ 캠페인, 다양성 헌장 서명 등은 단순한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산업 전체의 방향 전환을 상징한다. 그리드 걸 폐지는 이 큰 그림의 일부였다.

폐지 이후 — 무엇이 그리드를 채웠나

그리드 걸
그리드 걸 · 사진 Tokumeigakarinoaoshima,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그리드 걸이 사라진 자리는 어떻게 채워졌을까. F1은 그리드 걸 대신 지역 커뮤니티 대표, 팬, 어린이 등 다양한 참여자를 그리드에 세우는 방식을 실험했다. 이는 그리드를 단순한 홍보 공간이 아니라 팬과의 접점으로 재정의하려는 시도였다. 일부 레이스에서는 지역 출신 유스 프로그램 참가자들이 번호판을 들고 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변화가 완벽하게 매끄럽지는 않았다. 오랜 팬들 중 일부는 그리드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꼈고, 새로운 방식이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F1 그리드는 지금도 완전히 통일된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으며, 각 그랑프리 개최국의 문화와 주최 측의 선택에 따라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는 글로벌 스포츠와 로컬 문화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한편 WRC(세계 랠리 챔피언십), MotoGP 등 다른 시리즈들은 F1보다 변화의 속도가 느렸다. 일부 시리즈는 ‘레이스 앰배서더’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역할을 유지하기도 했다. 이는 그리드 걸 폐지가 모터스포츠 전체의 완전한 문화 변화를 이루었다기보다, 아직 진행 중인 전환의 한 장면임을 보여준다.

일본·아시아 레이스퀸 문화의 지속
일본 슈퍼포뮬러, 슈퍼GT 등 아시아권 시리즈에서는 ‘레이스퀸(Race Queen)’ 문화가 F1의 그리드 걸 폐지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유지됐다. 일본의 레이스퀸 문화는 모델·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깊이 결합되어 있어, 서구의 그리드 걸 논쟁과 같은 맥락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문화적 맥락의 차이가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낳는 사례다.

한국 렌즈 — 국내 모터스포츠와 레이싱 모델의 현주소

한국에서 모터스포츠와 레이싱 모델의 관계는 어떨까. 국내 최대 규모의 투어링카 레이스 시리즈인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를 비롯해, 코리아 스피드 페스티벌(KSF), 각종 원메이크 레이스 등에서 레이싱 모델은 오랫동안 이벤트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이들은 그리드뿐 아니라 전시 부스, 시상식 등 다양한 공간에서 활동하며 국내 모터스포츠 문화 특유의 팬 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감지된다. 글로벌 젠더 담론이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레이싱 모델의 역할과 이미지에 대한 재검토 논의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일부 시리즈와 팀들은 레이싱 모델의 역할 범위를 재정의하거나, 단순 장식적 역할 대신 팬 소통·홍보 앰배서더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물론 국내 모터스포츠 시장 규모와 팬층의 특성상, F1과 동일한 속도와 방식으로 변화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한국 모터스포츠의 또 다른 맥락은 현대·기아 등 완성차 브랜드의 존재감이다. 현대자동차는 WRC에 참가하며 글로벌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다양성과 포용성 가치를 내세우는 스폰서들과 협력하는 한국 브랜드들은 국내 이벤트에서의 관행과 글로벌 기준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지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리드 걸 논쟁이 한국 모터스포츠에 주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 ‘우리만의 전통’과 ‘글로벌 표준’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전통과 가치관의 충돌 — 이 논쟁이 우리에게 남긴 것

그리드 걸 논쟁이 단순한 이벤트 운영 문제가 아닌 이유는, 그것이 ‘스포츠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스포츠는 순수한 경쟁의 공간인가, 아니면 더 넓은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고 구현해야 하는 문화적 무대인가. 이 두 관점의 충돌은 그리드 걸 폐지를 둘러싼 갑론을박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논쟁이 ‘무엇이 여성에게 좋은가’를 여성 외부에서 결정하는 구조에 대한 메타적 비판으로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드 걸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폐지 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됐는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변화의 방향성에는 동의하더라도, 그 과정이 당사자들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다. 이는 앞으로의 스포츠 문화 변화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전통과 변화의 충돌은 모터스포츠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터스포츠는 특히 이 충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무대다. 수십억 달러의 상업 논리, 첨단 기술의 각축, 팬들의 열정적 문화가 뒤엉키는 공간인 레이스 그리드는,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드 걸의 등장과 퇴장은 그 긴 역사의 한 챕터일 뿐이다.

결국 그리드 걸 논쟁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모터스포츠 커뮤니티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는 점이다. 그리드는 비어 있지 않다. 새로운 가치관과 오랜 열정이 계속해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스포츠의 전통은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다. 시대와 함께 읽히고, 해석되고, 때로는 다시 쓰인다.

한국 팬의 시선

한국 모터스포츠 팬이라면 레이싱 모델 없는 시상식과 그리드가 아직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CJ대한통운 슈퍼레이스를 비롯한 국내 시리즈에서 레이싱 모델은 팬들과의 접점이자 이벤트 특유의 활기를 만드는 존재였다. 하지만 현대·기아가 WRC 무대에 서고, 국내 팬층에도 다양한 연령과 성별의 시청자가 유입되면서, 국내 시리즈도 서서히 이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그리드 걸 논쟁은 영국이나 이탈리아 그랑프리 서킷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제스피디움과 영암 코리아 인터내셔널 서킷의 그리드 위에서도, 우리는 어떤 모터스포츠 문화를 만들어갈 것인지 선택을 앞두고 있다.

출발 신호등이 꺼지면 드라이버들은 앞만 보고 달린다. 그러나 모터스포츠가 걸어온 길은, 단순히 빠른 속도를 향한 직선만이 아니었다. 시대의 가치관을 싣고, 때로는 그것과 충돌하며, 때로는 그것을 앞서가며 모터스포츠는 달려왔다. 그리드 걸이 서 있던 그 자리는 이제 다른 누군가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채우고 있다. 스포츠는 멈추지 않는다 — 그리고 그 변화를 지켜보는 우리의 시선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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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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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드 걸 — 中共中央办公厅,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그리드 걸 — Sitomon,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 그리드 걸 — Antti Leppänen, CC BY 4.0, via Wikimedia Commons
  • 그리드 걸 — Tokumeigakarinoaoshima,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